목차
이건용 작가의 작품 장르는 크게 오브제, 설치, 드로잉, 퍼포먼스 등 네가지로 대별된다고 정의할수 있습니다. 실험 예술로 한 길만 걸어온 이건용 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신체 드로잉입니다. 대표적인 작품은 1973년 ‘파리 국제비엔날레’ 파리시립미술관에 출품된 「신체항」입니다. 이 작품은 나무 둥치의 상부를 자르고 하단부와 뿌리를 잔존시킨 채, 기단부를 현장의 흙으로 채우고 뿌리를 심어놓은 작품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국내외 미술계에서 위상이 가장 크게 달라진 이건용 작가정보와 작품과 의미 그리고 그를 알수 있는 Q & A를 통해 그의 예술세계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건용 작가 정보
이건용은 1970년대부터 퍼포먼스, 조각, 설치, 영상을 넘나들며 작업해온 한국 행위예술 선구자다. 지금 컬렉터들이 환호하는 대표 연작 '바디스케이프'는 보통 화가들이 하듯이 캔버스를 앞에 놓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이른바 신체 드로잉, 몸의 움직임을 기록한 퍼포먼스의 결과물이다. 그는 '바디스케이프'와 같은 퍼포먼스를 수십 년간 이어왔다. 이건용 작가는 194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홍익대를 졸업한 뒤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ST (Space and Time)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1975년 '다섯 걸음'(국립현대미술관), 1979년 '이어진 삶' (상파울루 비엔날레) 퍼포먼스를 벌였다. 또 30여 년 국립군산대 교수로 재직했다. 1970년대 초반 ‘신체항’을 중심으로 입체와 설치 작업을, 이후 ‘실내 측정’ ‘동일 면적’ ‘달팽이걸음’ ‘장소의 논리’ 등 독창적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갤러리현대(2016, 2021), 부산시립미술관(2019), 4A아시아현대미술센터(2018), 국립현대미술관(2014) 등 국내외 미술 기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아버님이 목사님이고, 책을 무지무지 좋아하는 분이라 집에 책 1만 권이 있었어. 어머니가 부아가 나면 ‘이놈의 책 때문에 내가 보석을 사봤나, 옷을 사봤나, 애들 고기를 사줬나’ 하며 2층에서 창밖으로 책을 내던져. 그러면 아버지는 ‘건용아, 올려라’ 그 한마디야. 목사 집안의 절간 같은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서 여름방학마다 한 달씩 가출을 했잖어. 그래도 집에 책이 많으니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 보시던 <장자> <노자>를 읽었고, 중학교·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실존주의 철학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철학, 현상학이라든가 언어분석철학까지 접했지. 외대에서 언어학회가 열리면, 그날은 학교 결석하고 아버지 옷 입고 빵떡모자 쓰고 몰래 참석하는 거야. 그때부터 소통에 대한 문제, 언어와 논리 이런 거에 관심이 무지 많았다고. 내가 실험을 많이 했어. 중학교 대수 시간인데, 날이 더워서 창문을 죄 열어놓고 수업하는 판이야. 내가 슬쩍 나가서 창문을 쾅 닫았어. 전부 놀라고, 선생님이 내 뺨을 올려붙였잖어. ‘소통에 대해 실험을 좀 했습니다. 모두 쳐다봤다는 건 확실하게 전달된 거 아닙니까. 이런 게 소통인데 이론만 펴고 있으니….’ 그러다 또 혼쭐났지 뭐. 예술이야말로 불통이잖어. 중학교 들어가서 대학생 형들에게 뭘 물어봐도 알쏭달쏭하게 철학 용어를 섞어서 개똥철학만 얘기해. 모두 다 제 거가 최고라고만 해. 그때부터 예술의 소통에 지독하게 관심을 가지다 보니까 미술을 미술 안에서만 보지 말고 미술 바깥에서 풀어보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1973년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발표한 ‘신체항’은 “미술 밖에서 미술을 바라보겠다”는 의지의 현현이었다. 나무를 뿌리와 지층째 80평짜리 전시장에 옮긴 그 작품 말이다. 전시장이라는 제도적 공간 안에 예술품 대신 ‘이 세계의 신체’ 일부인 자연을 가져다둔 거지.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개념을 확장한 거랄까. 시작은 197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미술협회전>에 낸 작품인데, 대학 때 은사인 이마동 선생이 ‘정말 좋은 작품 했더라’ 하시더라고.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사실파 거두가 그 작품에 공감했다는 게 중요해. 그게 바로 예술로 소통했다는 거거든.”
이건용 작가 작품은?
모든 작품이 신체드로잉이었다. 캔버스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도 그리는가 하면, 캔버스를 등지고 그리기도 한다. 눈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 장소의 움직임에 따라 그리는 것이다. 작가는 바닥에 큰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유명한 「장소의 논리」라는 퍼포먼스를 직접 시연한다. 원 밖에서는 원 안의 사물이 <저기>가 되고 원 안에 들어오면 <여기>가 된다. 또 원을 나가서는 원 안의 사물이 <거기>가 되며 행동이 끝난 후에는 금을 밟으며 <어디>가 된다. 작가가 1975년에 시연했던 퍼포먼스였고 미친놈 소리도 들었다고 하지만, 신체와 장소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과 연구의 도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한테 부족한 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있는 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만나는 지점 그것이 예술이다, 자신이 쟁이가 되고, 특별한 기술을 갖고 뭔가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내 신체조건과 평면이 물감 등과 자연스럽게 만나서 이루어지는 현상을 드러내는 것, 그게 회화다.
Q & A
Q: 작품이 몇 년 전부터 대기 중인 구매고객이 수십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치솟고 있다. 그 원인은?
A: 2014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6개월간 개인전 열어주고, 해외에 있는 관장, 큐레이터, 평론가들이 보고 가서 ‘야, 이 사람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났어?’ 하며 놀랐다. 그러면서 이건용의 이름과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화랑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몰랐지 내가 숨어 있지 않았다. 나는 나를 보여주기 위해 파리, 북경, 동경, 호주, 미국 등 어디고 돌아다녔다’ 라고 했다.
Q:1970년대 파리 국제비엔날레 참가할 때 어떤 우여곡절 있었나?
A:당시 정부 보조를 받기 힘들었던 시절이라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화실 근처 지역상인들과 유지들이 아침에 모여 모닝커피를 마시는 대현동 어느 다방에 들어가 난생처음 모닝커피를 시킨 후 일어나서, 국위선양을 위해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작가로 참가하는데 항공료가 부족하다고 협조를 구했던 일이 있었다. 반응이 없어 돌아서서 나오려는데 창가에 앉았던 50대 남자 한 분이 불러서 무슨 이야기냐고 다시 물었다. 제2 한강교 지나기 전 오른쪽에 홀트양자회가 있는데 거기 가서 유럽 가는 고아를 데려다주겠다 하면 비행기 표를 준다고 가르쳐줬다. 9월에 파리 비엔날레가 있는데 마침 8월에 유럽에 갈 고아 2명이 있다고 하여, 갓난아이와 두 살배기 어린이를 오슬로와 스톡홀름 거쳐서 해당 기관에 인계해주고 파리에 갈 수 있었다.
Q: 다방에서 공개적으로 협조를 구하고 귀중한 정보를 얻은 용기가 참 대단하시다?
A: 미친놈이죠. 나는 안되다는 게 내 인생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젊었을 때부터 내가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파리에 도착했더니 「신체항」이라는 작품을 만드는데 나무를 누가 줘요? 고생 참 많았다. 그때가 드골정권 시절인데 프랑스 정부가 국립공원 수 하나를 기증해 줬다. 그래서 만든 것이다.
Q: 신체항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무엇인가?
A: 이 세계는 몸으로 이루어졌다. 아버님이 목사님이었고 내가 크리스챤인데, 만약 신이 존재하면서 우리에게 메시지만 보냈다면 나는 그 신을 안 믿을 것이다. 그분은 인간과 똑같이 여인을 통해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우리가 받을 고통을 대신하여 받아주고 이것이 참사랑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떠나가셨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냥 관념적으로 생각하거나 만들어 놓은 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몸으로 왔기 때문에 우리와 대화가 되고 소통이 되는 것이다.
Q: 아버님이 지도자급 목사님이었다고 하셨는데, 몸 이론과 행위예술과 관련하여 혹시 의견 충돌은 없었나?
A: 아버님은 문학을 하셔서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으셨다. 고향이 황해도 사리원인데, 친조부님이 양의사였다. 그 당시 종친들이 많이 살았던 강원도에 역병이 돌아 그 친척들을 치료하러 강원도에 가셨다가 그만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조부의 소지품을 정리하러 그곳에 갔는데 조부의 짐 속에서 쪽 편 성경책을 찾게 됐고, 그 성경책으로 인해 서울신학대학에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세브란스병원 간호사였는데, 외조부가 믿음이 아주 강한 분이어서 양가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Q: 그림은 언제부터 잘 그렸나?
A: 고등학교 때 벌써 국전에 입선했다. 그 당시는 수채화로는 입선하기 힘든 시대였다. 나는 내 나름대로 미술이론이나 철학 등의 미술 과정을 이미 고등학교 때 마스터 했다. 손이 해어질 정도로 그렸으니까. 뚝섬 근방에서 퍼포먼스도 일찍이 했고, 그러니까 미술의 모든 과정을 다 마치고 간판 따러 대학에 간 것이다.
Q: 고등학교 때 김창열 선생의 주목을 받은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A:실험적인 수채화였는데 도심을 그렸다. 막 쓰러질 것 같은 빌딩을 그렸다. 아침 등교하기 전 좀 일찍 6시에 나와서, 이젤을 갖고 명동, 태평로 등 도시 건물들을 그렸는데,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교통순경이 이제 그만해라 할 때까지 그렸다. 중2 때부터 프랑스 문화원, 미국문화원, 남산의 괴테 하우스 등 다 뒤지고 다녔다. 잭슨 폴록 등 화가의 작품만 아니라 독일의 작가 피터 한트겐, 프랑스 문화원의 앙띠 로망 소설 등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Q: 1976년부터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는 〈신체드로잉(Bodyscape)〉 연작은 세계 미술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어떻게 이런 회화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A: 1973년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나무를 뿌리와 지층째 전시장에 옮겨 작품으로 제시하는 〈신체항〉을 선보였는데, 비행기표 살 돈이 없어 홀트양자회에서 유럽으로 입양된 아이 둘을 데려다주는 조건으로 정말 힘들게 파리에 갔어요. 그때의 감각이 선명해요. ‘내 몸이 파리에 왔다’라는 감각! 그 감각을 통해 작가의 신체가 예술의 직접적인 미디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런 아이디어는 곧 미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만났다.
Q: 그 물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요?
A: 저에게 회화는 테크닉이나 그런 게 아니라 현상, 사건의 형태 같은 거에요. 중학교에 올라가서 미술 교과서를 받았는데 거기에 인상파, 큐비즘, 야수파, 추상화 같은 작품들이 죽 실려 있는 거예요. 그때 생각했죠. ‘내 이럴 줄 알았어.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고 있었어!’ 당시 저는 집에서 새벽 5~6시에 나와서 출근길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도시 풍경을 그리고 등교했어요. 덕수궁에서 사생대회를 하면 고리타분하게 궁궐에서 자연 풍경을 똑같이 묘사하는 걸로 등수를 매기다니 우습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신체드로잉〉은 제 키, 양팔과 다리 길이 등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범위까지 선을 그으며 신체가 평면을 지각해나가는 과정을 화면에 드러내는 거예요. 캔버스에 자연을 묘사하거나 감정을 쏟아내는 게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논리에 의해서 서술되는 현상을 기록하는 것이죠.
Q: 어떻게 중학교 시절부터 회화의 본질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나요?
A: 어릴 적 온 집 안에 책이 굴러다녔어요. 목사였던 아버님의 높다랗게 쌓인 인문학 책 무덤 속에서 자란 환경, 환자들이 일부러 찾을 정도로 아프지 않게 주사를 잘 놓던 손재주 많은 어머님의 특성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미국의 개념미술가 조셉 코수스가 〈철학 이후의 미술(Art After Philosophy)〉(1969)을 쓴 게 20대 초반인데, 사람들이 그걸 보고 대단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부터 갖고 있던 의문에 대해 혼자만의 연구를 해왔던 터라 그 나이에 나만의 개념이 확고하게 잡혀 있었죠.
Q:수많은 이벤트 가운데 〈달팽이 걸음〉을 대표적인 퍼포먼스로 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A: 첫째 그 행위는 복잡하고 장황하지 않고 단순해요. 백묵을 손에 든 채 쭈그리고 앉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바닥에 좌우로 선을 그어요. 느린 속도로 나아갈 때 선이 탄생하는 동시에 발바닥이 바닥과 만나 그 선을 지우게 됩니다. 그리는 것과 지우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죠. 19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프레스 오프닝 때 〈달팽이 걸음〉을 두 번째로 선보였는데, 동양에서 온 웬 비쩍 마르고 안경 쓴 남자가 구석에서 낙서를 하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어요. 다른 쪽에선 요셉 보이스가 퍼포먼스를 한다고 소란스럽기도 했고요. 한 5미터쯤 나아갔을까. 전 세계에서 온 기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반대편 벽에 다다라 천천히 일어나 끝을 알리니 어떤 이들은 다가와서 저를 끌어안으며 감동을 표했죠.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달팽이 몸에서 나온 진액이 흔적을 남겨요. 선을 그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지우는 행위를 결합시키는 〈달팽이 흔적〉은 회화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렸다 지웠다 하면서 그림을 완성하거든요. 저는 회화의 본질을 회화 바깥에서 사유하고 싶었어요.
Q: 작업에서 몸을 가장 중요한 요소다. 왜 몸인가?
A: "죽으면 몸은 썩고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는 몸의 차원에서 산다. 예를 들어, 신이 그저 저 위에 존재하며 인간에게 메시지만 보냈다면 아무 의미 없었을 거다. 인간의 몸을 가지고 왔고 몸을 십자가에 박히며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나. 우리가 영(靈)의 세계에서만 놀고 있으면 이 세상 문화나 경험이 아니다. 몸을 가지고 예술을 만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Q:어머니께서 의사가 되길 원하시며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 했다고?
A: "어머니 말씀 때문에 예술의 쓸모가 내 평생의 화두였다. 현대인들은 모두 자기 방에 갇혀 있는데, 난 예술은 서로 교감을 할 수 있게 매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예술은 쓸모 없어 보이는 일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며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의사가 되지 않았지만, 후회 없다."
Q:지금 왜 '이건용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나?
A: "나는 그동안 기존 울타리 안에 있지 않았다. 항상 바깥에 머물고, 바깥에서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할 수 있었다. 미술도 그렇지만, 해결책을 찾으려면 밖에서 봐야 한다. 한국 정치도 국회의원들이 국회 밖에서 정치판을 봤으면 좋겠다."
Q: 앞으로 계획은?
A: "난 이제 여덟살일 뿐이고 ^^;, 아직 실현하지 않은 아이디어가 많다. 더 과감하게 하고 싶었는데 미친놈 소리 들을까 봐 풀어놓지 못한 것들이 꽤 있다. 그것들을 슬슬 풀어놓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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