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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실존주의 예술의 대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생애와 예술작품,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들과 베이컨의 사생활!

by 갖고싶은예술 2023. 6. 3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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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20세기 영국의 유명한 화가인간 상태에 대한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묘사로 유명합니다. 종종 왜곡된 형상과 고립에 초점을 맞춘 베이컨의 예술은 실존적 두려움, 취약성, 절망에 대한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정체성과의 투쟁과 파란만장한 삶과 경험들은 그의 획기적이고 영향력 있는 작품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생애와 예술작품과 설명,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들과 베이컨의 사생활!에 대해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실존주의 예술이란?

    실존주의 예술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격동적이고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한 예술의 한 형태이며, 철학의 실존주의 운동과 관련이 있다. 이런 종류의 예술은 종종 소외, 자유, 죽음, 그리고 터무니없는 것과 같은 주제들과 씨름한다. 그것은 존재, 의미,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파헤치며 인간의 상태를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탐구한다. 그 목적은 종종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불안한 현실에 스스로 맞서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예술에서 당신은 종종 냉혹하고 극적이며 불안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위기에 처한 인간들, 황당하고 비논리적인 장면들, 혹은 외로움과 절망의 극명한 표현들을 묘사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인생을 혼돈스럽고, 예측할 수 없으며, 종종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보는 실존적 관점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알베르토 자코메티, 그리고 에드바르트 뭉크와 같은 많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주제에 대한 탐구로 인해 실존주의 예술과 연관되어 왔다. 그러나 예술 운동으로서의 실존주의는 인상주의나 입체주의처럼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존주의와 관련된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반드시 그렇게 분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작품은 종종 실존주의적 주제와 아이디어를 반영한다.

    Francis Bacon in his studio in Paris 1979
    Francis Bacon in his studio in Paris 1979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생애와 유년시절

    프랜시스 베이컨 (1909년-1992년)은 매우 영향력 있고 획기적인 영국 화가로 인간의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감정적인 강렬함, 실존적인 주제, 그리고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인정받고 있다. 베이컨은 1909년 10월 28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디 베이컨은 전직 육군 장교이자 경마 조련사였으며, 어머니 크리스티나 위니프레드 퍼스는 셰필드 철강 사업과 탄광의 상속녀였다. 그는 4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심각한 천식을 앓았고, 오랜 치료로 이어졌다. 이 병은 고립된 생활의 연속이였으며, 어린 시절을 다소 외롭게 만들었다. 베이컨은 어렸을 때 수줍음이 많았고, 옷을 입는 것을 즐겼다. 이것과 그의 여성스러운 태도는 그의 아버지를 화나게 했다. 아버지 에디 베이컨은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인물로 아들의 예술적 성향과 동성애 성향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베이컨은 천식 때문에 대부분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의 하녀 제시 라이트풋은 그의 양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에게 친구 관계를 제공하고 그의 초기 예술적 관심사를 키웠다. 한정된 정규 교육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은 역사, 독서, 그리고 예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특히 피카소와 같은 현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작품에 흥미를 느꼈다. 16세 때 아버지와 동성애 문제로 불화를 겪으면서 베이컨은 어머니의 신탁기금에서 일주일에 3파운드가 조금 넘는 돈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 그는 베를린으로 이사하기 전에 런던에서 잠시 살았고 파리에서 디자인과 그림을 시작했다. 베이컨의 생애는 과도한 음주와 도박이 뒤섞인 강렬한 창조적 작업의 시기로 특징지어졌다. 그의 떠들썩한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 때문인지 베이컨은 20세기의 가장 상징적이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왜곡된 인물들과 우울한 주제들로 특징지어진 그의 그림들은 시각 예술의 역사에 중요하게 남아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스타일과 주제 그리고 의미

    1.스타일

    베이컨의 스타일은 비유적이고 표현주의적인 것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그는 이러한 장르의 경계를 추상화로 밀어냈다. 그의 주제, 주로 인간의 형태는 종종 왜곡되고 괴괴하고 불안한 방식으로 전시된다. 그는 누더기와 손으로 페인트를 칠하거나 심지어 먼지를 그의 작품에 포함시키는 것과 같은 많은 파격적인 기술을 사용했다. 그의 색상 팔레트는 폭력감과 감정적 트라우마를 강조하기 위해 빨간색과 검은색을 강하게 사용하여 종종 강렬하고 극적이었다.

    2.주제

    베이컨의 주요 주제는 인간의 상태, 특히 실존적 불안, 고립, 취약성에 관한 것이다. 그는 종종 고립된 도형을 그렸는데, 종종 기하학적 구조나 설명할 수 없는 공간에 둘러싸여 갇힘이나 고립감에 기여했다. 피실험자들은 종종 불안한 폭력이나 극심한 감정적 고통의 장면에 관여한다. 베이컨은 인간의 몸과 그 연약함에 매료되었다. 그는 종종 존엄성과 정교함을 벗은 채,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상태의 몸을 묘사했다. 그의 작품은 종종 인간 본성의 원시적이고 종종 잔인한 측면과 현대 세계에서의 존재의 불안에 대한 주제를 담았다.

    3.의미

    베이컨의 작품 뒤에 숨겨진 의미들은 다면적이고, 종종 보는 사람들에 의해 해석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베이컨은 그림이 보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그의 묘사로 볼 때, 그의 그림은 존재에 내재된 내면의 혼란과 두려움에 대한 탐구로 볼 수 있다. 인간 형태의 왜곡은 심리적, 정서적 고통의 물리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종종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 그의 성적 취향, 그리고 그의 시대의 사회적 제약을 포함한 그 자신의 경험과 투쟁의 반영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화에서 영감을 받은 그의 일련의 그림들은 의식용 복장과 우리에 갇힌 채 공포에 질린 것처럼 보이는 비명을 지르는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권력구조에 대한 비판, 인간의 상태에 내재된 두려움에 대한 성찰, 또는 종교적 실존적 불안에 대한 탐구로 해석할 수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프란시스 베이컨의 사생활

    프란시스 베이컨의 사생활은 종종 그의 작품에 있는 본능적인 이미지가 암시하는 것처럼 격동적이었다. 20세기 중반에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였던 베이컨은 사회적 편견과 법적 제약에 직면한 하위 문화의 일부였다. 그의 관계는 복잡했고, 종종 변덕스러웠으며, 때로는 폭력적이었으며, 이것은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베이컨의 가장 길고 중요한 연애는 전직 전투기 조종사 피터 레이시와의 관계였다. 그들은 1950년대 중반에 만났고, 그들의 관계는 부분적으로 술과 레이시의 예측할 수 없는 성질에 의해 부채질된 열정적인 사랑과 극심한 폭력의 시기로 특징지어졌다. 베이컨은 레이시와의 관계를 자신의 작품에 가장 영향력 있는 요소로 묘사한 적이 있다. 그들 관계의 긴장, 불안, 감정적 격변은 종종 그의 그림에서 표현되었다. 레이시는 1962년 탕헤르에서 사망했다. 레이시가 사망한 후, 베이컨은 런던 이스트엔드 출신의 조지 다이어와 사귀기 시작했다. 다이어의 이미지는 1960년대 베이컨의 많은 작품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이어는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과 싸웠고, 비극적으로 1971년 파리 그랜드 팔레에서 베이컨의 주요 회고전 전날 자살했다. 다이어의 죽음은 베이컨과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베이컨은 술을 많이 마시고 도박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소호 음주 클럽 장면의 일부였다. 그는 카리스마 있고 현란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예술가로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활 방식은 여전히 보헤미안적이었고, 그는 동료 예술가, 작가, 술꾼, 그리고 범죄자들과 어울렸다. 말년에 베이컨은 런던 이스트엔드 출신의 젊은 노동자 계급 남성인 존 에드워즈와 사귀었다. 이전의 동료들과는 달리, 에드워즈는 베이컨의 예술에서 자주 주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베이컨은 1992년에 사망했을 때 그의 전 재산을 에드워즈에게 남겼다. 전반적으로 베이컨의 사생활은 개인적인 상실, 감정적인 고통, 그리고 실존적인 절망으로 가득했는데, 이 주제들은 그의 작품에서 강력하게 반향을 일으켰다.

    Francis Bacon and John Edwards
    Francis Bacon and John Edwards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예술을 창조하는 베이컨의 접근법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그는 깨끗하고 정돈된 스튜디오를 혐오했다. 1961년부터 1992년 사망할 때까지 그가 살고 일했던 런던 사우스 켄징턴의 7번 리스 뮤즈에 있는 그의 그림 작업실은 혼란스럽고 어수선하기로 악명 높았다. 그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중고 페인트 튜브, 붓, 누더기, 책과 잡지에서 찢어진 이미지, 오래된 캔버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고, 명백한 순서 없이 흩어져 있었다. 그가 죽은 후, 먼지를 포함한 스튜디오 전체가 꼼꼼하게 목록화되어 더블린 시립 갤러리 휴 레인에 재건되었다. 베이컨에 대한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그가 자신의 그림들을 많이 파괴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어떤 작품에 불만이 있다면, 그는 캔버스를 자르거나 그 위에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수백 점의 작품을 파괴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이컨은 또한 신체 접촉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고, 그의 그림에서 종종 유리 상자나 막대 뒤에 그의 대상을 묘사했는데, 아마도 이 두려움을 반영했을 것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을 "고립된 섬"으로 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로테스크의 화가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은 그의 작품의 호모 에로틱한 저음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인간 형태, 특히 남성 신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흥미롭게도, 베이컨은 전통적인 신체적 아름다움의 숭배자였고, 이러한 증거는 운동선수와 보디빌더의 사진 모음에서 표현된다. 결국, 그의 괴로운 삶과 종종 불안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은 런던의 소호 지역의 술집과 클럽에서 사교를 즐기는 카리스마적이고 사교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재치, 샴페인에 대한 사랑, 친구들에 대한 관대함으로 유명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스튜디오는 혼란스럽고 어수선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스튜디오는 혼란스럽고 어수선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가 죽은 후, 먼지를 포함한 스튜디오 전체가 꼼꼼하게 목록화되어 더블린 시립 갤러리 휴 레인에 재건
    그가 죽은 후, 먼지를 포함한 스튜디오 전체가 꼼꼼하게 목록화되어 더블린 시립 갤러리 휴 레인에 재건

    프란시스 베이컨의 대표작품과 설명

    1.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십자가의 밑바닥에 있는 인물들을 위한 세 가지 연구)-1944

    베이컨의 초기 걸작들 중 하나인 이 삼각형은 그를 주목받게 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복수심에 불타는 신 에우메니데스에서 영감을 받은 이 그림은 폭력적이고 취약한 세 명의 기괴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뒤틀린 형태는 척박하고 오렌지색 배경에 의해 증폭되는 원초적인 공포를 표현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만들어진 이 그림은 종종 그 당시의 끔찍한 폭력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Francis Bacon, 1944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Francis Bacon, 1944

    2.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화 이후의 연구)-1953

    이것은 아마도 베이컨의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이 그림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베이컨은 침착하고 귀족적인 모습을 유령처럼 반투명한 우리 안에 갇혀 울부짖고 괴로워하는 동물로 변신시킨다. 그 불안한 이미지는 심리적 고통에 대한 강력한 탐구이다.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 (1953)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 (1953)

    3.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십자가를 위한 세 가지 연구)-1962

    이 대규모 삼각편대는 그 중심에 망가진 시체 같은 모습을 가진 섬뜩한 도살장 장면을 묘사한다. 피비린내 나는 본능적인 이미지는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베이컨의 견해를 극명하게 반영한다.

    Francis Bacon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 Triptych, 1962
    Francis Bacon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 Triptych, 1962

    4.Portrait of George Dyer Staring at a Blind Cord(블라인드 코드를 응시하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1966

    베이컨의 연인 조지 다이어의 이 초상화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가슴 아픈 탐구이다. 다이어는 맹인 코드를 응시하며 강렬한 자기 성찰의 순간에 나타난다. 일그러진 모습과 삭막하고 폐쇄적인 공간, 불안한 분위기가 베이컨 작품의 특징인 실존적 불안감을 담아낸다.

    Portrait of George Dyer Staring at a Blind Cord (1966)
    Portrait of George Dyer Staring at a Blind Cord (1966)

    5.Triptych, May–June(트립티치)-1973

    이 작품은 1971년 비극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지 다이어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찬사이다. 베이컨은 다양한 고통의 상태에 있는 다이어를 묘사하는데, 그림자처럼 위협적인 인물들이 그를 괴롭힌다.삼부작은 슬픔, 죄책감, 상실의 극명한 화신으로 다이어의 죽음이 베이컨에 끼친 깊은 영향을 반영한다. 

    Triptych
    Triptych

    이 그림들은 각각 베이컨의 독특한 예술 양식을 모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굽히지 않는 정직함과 본능적인 강렬함으로 인간 상태의 어두운 측면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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