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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아르 누보의 거장, 알폰스 무하 : 광고 예술의 선구자!

by 갖고싶은예술 2023. 7. 26.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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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폰스 무하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과 창조적인 열정으로 20세기 초 아르 누보(Art Nouveau) 운동을 대표하는 아티스트입니다. 그의 미학은 그림, 포스터, 광고, 북커버, 그리고 장식 예술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알폰스 무하의 생애와 화풍,평가, 전시 정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과 여담에 대해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의 생애

    Alfons Maria Mucha, 주로 Alphonse Mucha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체코 출신의 유명한 그래픽 아티스트이며, 그의 작품은 "아르누보" 스타일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1860년 7월 24일 모라비아 지방의 작은 마을, 이반치체(Ivančice)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5명 형제자매 중 막내였습니다. 무하의 어머니 아말리에 말라는 독신주의자였습니다. 그리하여 30대까지 비혼을 고수해왔는데, 어느 날 천사가 내려와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길 부탁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때마침 그녀의 친척에게 편지가 왔는데, 마지막으로 중매를 권하는 편지였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미 아이 셋 딸린 홀아비였던 법원 직원 온드레이 무하와 결혼하여 아들 알폰스와 딸 아델라, 안나를 낳았습니다. 무하의 어머니는 첫번째 자식인 알폰스 무하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는 무하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었지만, 그들이 살던 곳은 시골이라 방편으로 연필이 달린 목걸이를 만들어 선물하였습니다. 그렇게 알폰스 무하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으며,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년기에는 성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교회에서 활용될 다양한 종류의 종교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초기에 예술적인 감각과 기술을 키웠습니다. 그는 15세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빵집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고, 그는 예술 교육을 받기 위해 빈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청이 거절되었고, 이는 그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술가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는 독학을 하며 그의 예술적인 기술을 계속 발전시켰습니다. 20세 때, Mucha는 미술학교에 입학했지만, 그의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인정받았고, 그는 교회 벽화를 그리는 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그의 예술적 경력의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이는 그가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쥴리앙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 Mucha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공부했으며, 그의 첫 번째 포스터 작업인 "Gismonda"가 극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면서, 그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Mucha는 예술의 모든 형태를 사랑하였고, 그는 그의 삶을 통해 그의 열정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그래픽 아티스트로서의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은 포스터, 광고, 책 표지, 그리고 세트 디자인에서도 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1939년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작품은 여전히 전 세계의 아트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아르 누보의 거장 : 알폰스 무하 스타일
    아르 누보의 거장 : 알폰스 무하 스타일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의 화풍

    그의 스타일은 극도로 이상화된 여성과 그를 장식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사물로 구성되며, 소위 말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화풍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또한 배경과 장식에 매우 공을 많이 들이는 화풍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무하의 감각적인 화풍은 사회적 급변으로 인해 그의 말년에는 지나치게 민족적인 구형 예술이라며 프라하 미술계에서 무시당하기 시작했고, 모더니즘 이후에는 아예 그 존재가 잊혀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1960년대부터 무하의 작품이 재평가 받기 시작해 현대에서 명성을 되찾았다. 도리어 현대에는 일반인에게는 거부감이 심한 현대미술(추상, 행위예술 등)과 달리 취향을 덜 타는 편이라 인기가 좋았습니다. 특히 기호화된 자연물과 인물의 형태는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프라하의 프라하 성 내부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 좌측면에 그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습니다. 그의 독특한 화풍 덕에 보통 스테인드글라스와는 달라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난 색유리를 조합해 하나의 그림으로 구성하는 반면, 무하는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린 후 가공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무하의 화풍은 후에 일본의 망가 화풍, 특히 미소녀 그림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이는 과거 뿐만 아니라 현대의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도 무하 특유의 화풍을 모방하거나 오마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다. 덕분에 아르누보의 유행기간은 짧았지만, 현재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 사이에선 여전히 이 아르누보가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화려한 꽃과 도안,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과 옷자락에 둘러싸인 미소녀 캐릭터의 일러스트와 알폰스 무하의 그림을 비교하면 유사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순정만화에도 영향을 많이 끼쳐서, 주로 인물이 꽃이나 화려한 장식 배경과 함께 나오는 장면을 잘 보면, 무하의 장식미를 강조하던 화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 (Alphonse Mucha eMotion in SEOUL)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 (Alphonse Mucha eMotion in SEOUL)

    전시정보

    • 전시제목-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 (Alphonse Mucha eMotion in SEOUL):  아르누보 스타일의 대가인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디지털화하여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현하는 글로벌 브랜드 iMUCHA PROJECT(아이무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된 본 전시는 미디어아트와 작품전시 두가지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더욱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        
    • 일정- 2023-07-22 ~ 2023-10-30
    •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전시1관
    • 전시문의- 전화)02-6204-7236  메일)plan@sycomad.com
    • 후원-주한 체코 공화국 대사관, 국민일보
    • 제작지원-신용보증기금
    • 주최/주관-(주)에스와이코마드
    • 시간- 오전 10시 ~ 오후 8시 (입장마감 오후7시)*휴관일 없음
    • 관람비용- 성인 20,000원, 청소년 15,000원, 어린이 13,000원, 특별권 11,000원
     

    전시,프로그램 > DDP(KOR)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 Alphonse Mucha eMotion in SEOUL 아르누보 스타일의 대가인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디지털화하여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현하는 글로벌 브랜드 iMUCHA PROJECT(아이무하 프로젝트)

    www.ddp.or.kr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의 평가

    현대미술에 끼친 지대한 영향 탓에, 현대 일러스트레이터의 시조로 여겨집니다. 19~20세기를 거쳐간 유명 화가 중 굉장히 무난하고 평탄한 인생을 산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는 부모가 곁에 있었고, 30대 중반에 사라 베르나르의 전담 디자이너로 발탁되어 유명세가 치솟았기에 가난으로 고생한 기간이 짧습니다. 40살이 되기 전에 그는 이미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명성을 퍼뜨린 상태였습니다. 또한 예술의 소재로서 여성을 좋아한 것과는 별개로 성적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여자관계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않았던 당대의 많은 남성 화가와 달리, 무하는 그다지 편력을 보이지 않다가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해로했습니다. 말년에 민족 예술가로 활동하다 나치에 찍힌 시기를 빼면 풍족한 삶을 영위했으며,  79세에 사망했습니다. 요약하면 재능이 탁월하며 금전운이 따르고, 인간관계도 원만했으며,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삶을 살았던 셈. 상업예술과 민족예술이라는 2가지 분야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드문 인물이기도 합니다.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알폰스 무하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알폰스 무하(Alfons Mucha)는 그의 아트 누보(Art Nouveau) 스타일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에는 많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신비주의자:

    무하는 종교와 신비주의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프리메이슨(Freemason)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종종 신비학과 신성한 기하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2.슬라브 민족주의자:

    무하는 슬라브 민족주의에 깊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슬라브의 서곡(Slav Epic)"은 이러한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 거대한 시리즈는 슬라브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3.광고의 선구자:

    무하의 포스터 작품은 그의 시대에 광고 예술의 새로운 기준을 설정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상품이나 이벤트를 홍보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었습니다.

    4.교도소에서의 생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무하는 그의 슬라브 민족주의 신념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교도소에서 생활하였으며, 이 경험은 그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5.통화 디자인:

    무하는 1920년대 초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새로운 통화인 체코 크로나의 첫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디자인은 결국 발행되지 않았습니다.

    6."Gismonda"의 성공은 우연의 일치에서 시작 :

    1894년에, 그는 광고 포스터를 위해 프랑스 배우 사라 버나르를 그리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의 작품 "Gismonda"는 사라 버나르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이 빠르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였습니다. 사실 그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누리고 있는 정규 아티스트 대신 임시로 호출된 것이었습니다.

    사라 베르나르 Sarah Bernhardt의 초상사라 베르나르 Sarah Bernhardt의 초상을 포스터로 만든 알폰스 무하 작품
    왼쪽)프랑스 여류 화가 루이즈 아메바(1853-1923)가 그린 사라 베르나르의 초상이고, 오른쪽)이 알폰스 무하가 사라 베르나르를 포스터로 만들어 대중 예술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사라 베르나르에 관하여 : 여기 한 여자의 초상에 1875년이라고 상단에 적혀있다.

    그녀 나이 서른 한 살 시절의 모습, 창녀의 딸로 태어나 수녀가 되길 희망했던 그녀 역시 한때 고급 창녀였다. 아이 하나를 낳고 무대에 올랐던 그녀는 일약, 폭풍 노도를 일으키며 미국과 유럽을 휩쓸었다. 그녀는 수많은 화가들과 사진작가들에게 시대적 영감을 주었고, 그녀의 그림을 그리기면 하면 명성과 부를 안겨주었던 그녀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디바,신의 여자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그림은 “사라 베르나르 Sarah Bernhardt의 초상” 프랑스 여류 화가 루이즈 아메바(1853-1923)가 그렸다. 우연한 기회에 1894년 무하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만나 포스터를 제작하게 되었고, 이 전까지 무명에 불과했던 무하를 찾아내고, 그의 재능을 꽃피우게 한 것은 바로 사라 베르나르였고, 그녀의 포스터였다.

     

    7.체코 독립을 위해 활동 :

    Mucha는 체코의 독립을 열망했습니다. 그는 "슬라브 에픽(Slav Epic)"이라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수행하여 슬라브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기리려 했습니다. 이 작품은 20개의 대형 캔버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8.그는 미스테리어스한 메이슨 사회원:

    그는 프랑스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마술과 신비주의에 관련된 메이슨 사회, '마틴리스트(Martinists)'의 멤버였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신비주의적 요소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영향 때문입니다.

    9.나치에게 체포되었던 적 :

    제2차 세계대전 동안, Mucha는 그의 슬라브 출신과 체코 독립을 지지하는 활동 때문에 나치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체포 후 몇 달 만에 석방되었지만, 그 경험은 그의 건강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그로 인해 1939년에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여담

    이후 각종 포스터와 사계 등의 작품을 제작했고,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만난 이후로는 조각도 제작하였다. 이때 무하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무하가 디자인한 무대 의상을 현실에서도 입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 당시 파리 패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쏟아지는 장신구 디자인 주문에 지친 무하가 컨셉 디자인을 담은 책인 <공식 자료집> 까지 출판할 정도였다. 본인은 "밑천 다 퍼줄 테니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태도였지만 이를 통해 무하의 디자인이 더 알려지는 역효과를 초래해 더욱 요구가 쇄도했다고 한다. 무하의 작업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의욕이 왕성했음에도 도저히 밀려드는 주문량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우표, 화폐 디자인을 손수 하기도 했다. 체코의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였던 이반 렌들은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엄청난 양으로 수집하기로 유명했고, 이를 가지고 종종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906년에 결혼한 아내로 미술학도였던 마리 히틸로바(Marie Chytilova, 1882-1959)는 남편의 매니저이자 딜러로 활동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아들 이르지(Jiří, 1915-1991)는 번역가 겸 작가로 아버지에 대한 전기를 썼으며, 딸 야로슬라바(Jaroslava, 1909-1986)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부친의 작품을 복원한다. 이렇게 복원된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은 슬라브 서사시. 두 아이들은 무하의 작품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무하는 사교적인 성향이라 모임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고, 친구가 많았다. 또한 성격이 무른 편이어서, 누가 돈 빌려달라고 찾아오면 호구처럼 다 내줄 때가 잦았다고 한다. 좋아하는 예술가에겐 지원도 아낌 없이 해주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친구는 그보다 12살 많은 폴 고갱이었다. 둘 다 돈 없고 미래가 불투명하던 시절 파리에서 만났으며, 고갱이 무하의 아틀리에에서 장기간 숙식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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