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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입니다! 우리나라 특유의 향토적인 소재들을 즐겨 다루며 해학과 천진무구한 소년의 정감이 녹아 있는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짧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이중섭의 삶과 그의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내와의 러브스토리, 그의 작품전시에 갈 때 알아야할 정보팁과 기타 소소한 정보들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중섭의 삶
이중섭(李仲燮)은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중섭은 부유한 지주의 막내였고, 1920년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외가에 맡겨졌고, 평양의 종로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릴 때부터 밥 먹는 일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소질도 뛰어났습니다. 학교 공부는 잘하지 못해서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대신 평안북도 정주군으로 내려가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프랑스 유학파인 미술교사 임용련을 만나 미술지도를 받았고, 임용련은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왔으며, 그의 "조선 사람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라는 연설에 이중섭은 깊게 감명받았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적인 미를 추구하고, 서명을 할 때 항상 풀어쓰기로 서명을 한 것이 임용련의 영향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실제로 이중섭의 작품들을 잘 보면 한켠에 ‘ㅈㅜㅇㅅㅓㅂ’이라고 풀어 쓴 서명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후 친구 김병기와 문학수가 다니던 일본 문화학원 미술학부로 옮겼습니다. 문화학원의 분위기는 전위적이고 자유로웠고, 이곳에서 수학하면서 이중섭은 야수파의 자유롭고 강렬한 묘사를 선보이기 시작했으며, 문화학원 재학 중 일본 미술 공모전에 출품하여 주목을 받았고, 1940년 미술창작가 협회전에서 협회상을, 1943년에는 태양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때 출품작이 <소와 어린이>인데, 이중섭이 즐겨 다루던 향토적인 소재가 이른 시기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문화학원에서 훗날 부인이 되는 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를 만나게 되었으며, 1944년 귀국하여 함경남도 원산에 머무르며 작품을 준비했고,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습니다. 1946년 첫 아이가 태어나지만, 해를 넘기지 못하고 디프테리아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중섭은 큰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지게 되고, 1947년 해방기념 전람회에 죽은 첫아이를 기리는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46년 원산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봉직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중섭은 전국을 전전하며 불안정하고 궁핍한 생활을 연명했으며, 1950년 12월 어머니를 남겨두고, 두 아들과 조카, 아내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왔고 다시 제주도로 옮겼습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이중섭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고, 폐를 끼쳐도 어떻게든 갚아야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습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도 능숙하지 못하다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부인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 재봉질을 해가며 연명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중섭이 제주도 서귀포에 거처를 얻어 머물렀던 기간은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11개월 남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중섭은 제주도에 살면서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 등 많은 대표작을 남겼습니다. 이른바 서귀포 시대의 그림들은 주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바다, 물고기, 게, 아이들 등 제주도의 향토적이고 소재들이였습니다. 제주도에서 이중섭은 피난민 보급품과 고구마로 연명하며 궁핍하게 지냈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마지막 행복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현 서귀포시 정방동/서귀동 512-1번지) 그래서 이중섭에게 제주도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난처였지만, 이상적인 낙원이기도 했으며, 서귀포 시대의 그림이 대부분 따뜻하고 해학적이고 즐거운 이미지가 넘쳐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제주도 서귀포시에는 ‘이중섭미술관’이 있고, 제주도에서 머물렀던 초가를 중심으로 한 이중섭거리가 만들어져 있다. 매년 이중섭예술제도 개최되고 있습니다. 1952년 종군화가단에 입단하여 활동했으나, 부인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이주하였습니다. 1953년 동경에서 가족들과 해후했지만, 다시 홀로 귀국하였고, 이후 다시 가족들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후 이중섭은 통영, 대구, 진주, 서울 등지에 머물며 <소> 연작과 <부부> 등 걸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전을 개최하며 활발한 작품활동에 몰두하는 한편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 보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으나 후배의 배신과 사기로 생활이 궁핍해졌고, 영양실조와 거식증이 생겨 친구가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고, 10월엔 성베드루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 상태가 다소 호전되어 12월에 퇴원했습니다. 이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청량리정신병원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병원 원장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닌 심한 간염증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하였습니다. 그러다 여름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황달, 정신병, 거식증 등이 겹쳐 안타깝게도 9월 6일 향년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습니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갔을당시, 며칠 전에 죽은 이중섭의 시체가 침대 위에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죽은 그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병원비 독촉장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평소에 친한 사이였던 3살 아래의 시인 구상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이중섭의 가족들 및 친구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 공원묘지에 있습니다.
이중섭과 그의 아내 마사코의 러브스토리
1939년, 같은 미술부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1921 ~ 2022)를 만나 교제를 시작합니다. 당시 이중섭은 굉장히 미남에다가 운동, 노래도 잘 하고 그림 실력도 탁월해 교내의 인기스타였다고 합니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연애 중에 서로를 '아고리', '아스파라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아고리'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 친구들이 턱(あご, 아고)이 길었던 이(李,)중섭을 부르던 별명이였습니다. 요즘말로 말하면 '턱돌이' 비슷한 셈입니다. 또한 '아스파라거스'는 둘이 하얀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을 자주 같이 먹고는 했는데, 길쭉한 아스파라거스와 마사코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해서 이중섭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합니다. 또 이중섭은 마사코를 '발가락군‘이라는 애칭으로도 많이 불렀는데, 전에 마사코가 발가락을 다쳐서 이중섭이 치료해 준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우연히도 둘 다 발가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절한 남편 평생 사랑, 이중섭의 아내“야마모토 마사코
“ 아버지가 열정적이었다면 어머니는 심지가 곧고 차분한 분이셨어요. 낯도 좀 가리셨고요. 말 안 듣는 아들에게 큰소리 한번 치신 적이 없었어요. 아마도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서로 상반된 성격이라 오히려 끌렸던 것 같아요.” "모친께서는 멋진 인생을 사셨습니다. 아프시지도 않고 평온하게 가셨어요.”
올 8월 13일, 화가 이중섭(1916∼1956)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1921∼2022) 여사가 향년 102세로 별세했습니다.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국민화가 이중섭의 그림에는 힘찬 소, 은박지나 엽서에 꽃게와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그리고 사랑하는 부부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 그림 속의 여인이 바로 아내 마사코입니다. 이중섭은 그녀를 ‘이남덕’이란 한국식 이름으로 부르며 무척 사랑했습니다.이 이름의 뜻은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일본 도쿄 소재 문화학원에서 선후배로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1943년 이중섭이 귀국하자 마사코는 광복 직전 현해탄을 건너 그의 고향 원산에서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며 평온하게 지낸 것도 잠시, 6·25전쟁이 터지자 부산과 제주도로 계속 거처를 옮기며 지냈습니다. 이중섭과 마사코의 결혼생활은 10년, 그중 같이 살았던 기간은 7년. 마사코는 어린 두 아들을 가진 채 35세에 과부가 됐습니다. 양재를 직업으로 삼았고, 생명보험 회사에 근무한 적도 있으며, 환갑의 나이에 도쿄 긴자의 기독교용품점에서 일을 시작해 80세까지 근무하며 지냈습니다. 이런 마사코 여사가 크게 상처를 받은 일이 있다고 한다. 1979년 한국에서 본 연극 ‘화가 이중섭’에서 마사코가 남편을 버리고 일본에 귀국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고, 특히 가족을 찾은 이중섭을 장모가 냉대했다는 부분입니다. 마사코의 부모님은 기독교인으로 두 사람 사이를 반대하기는커녕 한국에 갈 때 그녀를 응원하고 지지해 줬고, 사위가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올 수 있도록 애써 주신 분이었습니다. 이 오류의 시작은 원작인 1973년에 발간된 고은 작가의 소설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였습니다.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고 요절한 이중섭, 평생토록 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홀로 헌신적 삶을 산 마사코. 가족을 사랑했고 아꼈던 두 사람의 사랑을 떠올리며 마사코 여사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둘째아들 야스나리씨의 기억
야스나라씨는 어머니(마사코)를 그리며 가장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김치’라고 했습니다. 마사코 여사는 원산에서 시어머니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 늘 저녁 식탁에 김치를 올렸다고 합니다. 야스나리 씨는 “나는 어머니의 김치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추억했습니다. “아버지 작품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흰소’입니다. 일본에서 한 번도 아버지 작품 전시를 하지 못했는데, 일본에서 아버님의 작품전을 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사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1953년 일본에 일주일 오셨을 때 안겼던 희미한 기억이 전부입니다. 그래도 슬프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야스나리 씨)
그림주제
이중섭은 소를 비롯한 어린이, 물고기, 게달, 달, 새 등 우리나라의 향토적인 소재들을 즐겨 다루며 해학과 천진무구한 소년의 정감이 녹아 있는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동화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전적인 요소가 강했습니다. “싸우는 소”,“흰소”,“움직이는 흰소”,“소와 어린이”,“황소”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닭과 가족”,“사내와 아이들”,“길 떠나는 가족”과 그밖에 수많은 은지화(담뱃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들은 후자를 대표하는 작품들입니다.
이중섭 전시 가기전 알아야 할 정보팁!
1.이중섭의 다사다난했던 삶 그는 일제 강점시대 작은 농촌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에는 부유한 집안 덕에 제대로 된 미술교육도 받고, 일본으로 유학도 다녀왔지만, 광복 이후, 이중섭의 비극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이중섭의 가족이 모여 살던, 원산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이중섭의 형은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친일파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당시 실력 있는 젊은 화가였던 이중섭에게 사회주의 정권은 선전용 그림을 요구했지만, 그 정권에 의해 가족을 잃었으니 이중섭은 당연히 거절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전시회를 열지 못하고, 변변한 직업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이에 이중섭 집안의 가세는 점점 기울게 됩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이중섭은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고 이후 통영과 제주도를 전전하며 가난한 삶을 이어갑니다. 이 와중에 이중섭 장인어른의 건강이 위급해졌고, 이중섭의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게 됩니다. 이중섭은 가족을 그리워하며 그들과 함께 살 여윳돈을 마련하기 위해 큰 상업 전시회를 준비합니다. 결국 이중섭은 오랜 고생 끝에 전시회를 열었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이어집니다. 이중섭은 이후 캔버스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가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
2.가족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자신의 가족을 잃고, 헤어진 탓인지 이중섭의 많은 그림에는 가족애가 담겨있습니다. 이중섭은 항상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했고, 그들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항상 그들이 함께 모여 사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이중섭의 많은 작품에서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런 이중섭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 드러나는 작품이고, 이는 인간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만한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2016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 ‘이중섭, 백년의 신화’라는 전시에서 가족과 일본어로 주고받은 꽤 많은 엽서가 공개됐습니다.“내가 사랑하는…”,“내가 아주 좋아하는…”,“나의 착한…”등으로 시작하는 편지(엽서)글들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3.소 이중섭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 바로 소입니다. 이중섭은 어려서부터 소를 엄청 좋아했다고 합니다. 원산에 있을 적, 그는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할 때도 있었는데, 어찌나 자세히 관찰했던지 소도둑으로 오해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많은 미술학자들은 소는 가장 한국적인 상징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농촌의 모습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를 통해 이중섭은 일제 강점 시기, 자신의 민족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중섭의 유명한 소 그림은 대부분 그가 죽기 2-3년 전에 그려진 그림들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그의 소그림은 단순히 한국의 민족성만을 드러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중섭 본인의 삶을 소에 투영해서 각 시기 그가 가지고 있던 감정들이 소에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4.이건희 이번 전시는 총 9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됩니다. 그중에 80여 점은 삼성 故 이건희 회장이 가지고 있던 개인 컬렉션이라고 합니다.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에 있는 그림이 200여 점이라고 하니, 개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이중섭 작품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왜 이건희 회장은 그렇게까지 이중섭 그림에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건희 회장도 이중섭처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식민 지배의 어려움과 전쟁의 비극 등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그는 이중섭의 그림을 통해 자유, 가족 간의 사랑 등 동시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가치에 누구보다도 공감했을 것입니다.
전시예매방법 꿀팁!
이번 국립 현대 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전은 100% 예약으로 이뤄집니다. 각 시간마다 전시 관람객을 400명으로 제한한다고 합니다.. 이 전시회의 예약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1.첫 번째는 매일 오후 6시 국립현대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관람 14일 전 전시 표를 예약하는 방법입니다. 핸드폰 본인 인증으로 빠르게 예약할 수 있지만 금세 표가 매진되니 시간 맞춰서 전시 예약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2.두 번째는 매일 오전 9시 당일 취소표를 예매하는 방법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표가 취소된다고 하니, 이것도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3.마지막은 현장에서 직접 예약하는 방법입니다. 선착순으로 한정된 번호표를 받고 입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중섭을 위한 시
나희덕 시인(2007) 은 이중섭의 이런 삶을 통해 그를 기리는 시를 썼습니다.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 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 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게 가질 수 있었다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 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질에 세 든 소라게처럼 — 나희덕, <섶섬이 보이는 방 - 이중섭의 방에 와서>
기타 소소한 정보
이중섭이 그린 초상화는 자기 자신을 그린 자화상을 포함해서 5점이 남아 있습니다. 자화상을 제외한 초상화 중 1점은 서귀포 시절 집 주인 부부 중 남편인 송태주 씨의 초상화이고, 나머지 3점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인근 서귀포 사람들의 그림입니다. 본래 이중섭은 초상화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해도 그려주지 않았을 정도이고,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도 한 자리에 모인 가족 그림은 그렸어도 가족 개개인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이 초상화들도 당시 전사자들의 가족들과 집 주인인 송태주가 부탁해서 그린 것. 전사자들의 초상화는 겨우 남아 있는 증명사진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이웃 주민들은 사례로 이중섭 가족에게 보리쌀과 고구마 등을 나눠줬다고 하며, 이 초상화들은 전사자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송태주의 초상화는 어려운 처지에 이런 밥벌이를 소개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집 마루에 앉혀 놓고 그려준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중섭 본인의 자화상은 1955년에 그렸는데, 당시 이중섭은 몸과 정신 모두 병으로 망가진 상태여서, 주위 사람들이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 치료를 시키려 하자, 이중섭은 '나는 미치지 않았다. 내가 미쳤다면 그림을 멀쩡하게 그릴 수 있겠느냐?'라는 의도로 자화상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중섭 화백 부인 '이남덕' 마사코 여사 별세...향년 10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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