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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남미의 피카소, '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 폐렴 합병증으로 별세!

by 갖고싶은예술 2023. 9. 22.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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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난도 보테로(스페인어: Fernando Botero Angulo, 1932년 4월 19일~2023년 9월 15일)는 콜롬비아의 화가, 조각가입니다. '남미의 피카소', '행복한 뚱보들의 작가'로 불리며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과장된 인체 비례와 뚱뚱한 모습으로 묘사된 인물 그림으로 유명하며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뚱뚱한 모나리자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특히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명작들의 인물을 풍선처럼 부풀리는 독특한 화풍이 압권입니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삶과 작품스타일, 대표작, 영감을 받은 작가, 각종 Q&A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삶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1932~)는 1932년 당시 카리브 연안 국가 중 가장 낙후된 콜롬비아 안데스산맥의 깊숙한 산속 메데인(Medellin)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려 16살부터 유력지 ‘엘 콜롬비아’ 일요판에 삽화를 그렸다. 당시 메데인은 오로지 바로크 양식의 성당과 고전 양식의 도시였다. 어느 날 우연히 초기 표현주의 기법과 큐비즘 스타일의 피카소 작품을 접하고 이후 국전 살롱에서 ‘해변가’로 2등을 하고 받은 상금으로 유럽으로 간다.
    1.대가와의 첫 만남
    보테로는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서 고야,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등 그토록 원하던 대가들의 작품을 마주하였다. 산페르난도 아카데미에 등록한 그에게 교수들은 현대양식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으라 했지만, 그는 ‘무엇이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작품이 되게 하는가?’에 주목했다. 학교 대신 프라도미술관에 간 그는 고야의 작품에서 유머와 위트를 배우고, 벨라스케스 작품에서 섬세함과 견고한 터치를 익혔다. 그는 대가의 원작에서 고전의 색감과 공간미를 터득해가는 데에 심취하며 지냈다.
    2. 두 번째 영향
    이듬해 현대미술의 메카인 파리로 떠난 그에게 파리의 모더니즘 아방가르드는 난해했으나 루브르미술관에서 보물 같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미술을 발견했다. 그리고 피에로 델 라 프란체스카의 조형적으로는 엄격하고 견고하면서도 감각적, 촉각적 상상을 유발하는 그림에서 자극을 받는다.
    3. 세 번째 영향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는 소위 스탕달 신드롬에 빠진다. 경이로운 예술작품을 보고 충격에 직면한 것이다. 그는 프레스코 기법과 르네상스 고전 양식을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1952년 콜롬비아로 귀국하여 혹평을 받고 1956년 멕시코로 간다.
    4. 라틴 미술에 눈을 뜨다.
    멕시코시티에서 쿠바의 이른바 봉쇄기의 ‘닭고기 요리법’으로 연명하며 치열하게 살던 어느 날 보테로는 벽화미술의 거장인 디에고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의 작품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뿌리를 생각하게 된다. 감각적이고 통통하면서도 자그마한 리베라의 인물들은 인간의 형상을 과장 혹은 완전히 축소시키는 보테로의 조형성의 단초가 된다. 유럽의 고전미술을 자기 작품의 이상형으로 보았던 보테로는 멕시코에서 비로소 라틴미술의 정체성에 눈을 뜬다. 그만큼 멕시코는 그의 조형성과 작품 주제선정에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르네상스의 볼륨감을 갖고자 고민했던 보테로는 만돌린을 그리다가 새로운 조형 비율을 발견하게 된다.

    “나에게 리베라의 작품은 매우 큰 의미였다. 그는 우리에게 유럽에 지배받지 않은 미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혼혈의 인물들, 오래되고 고유한 것의 혼합과 스페인 문화에 매료되었다.”

    5. 작품 변화
    1960년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무렵 그의 작품은 추상과 형상이 혼합되어 있었다. 1961년 현대미술의 메카 뉴욕 MoMA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도로시 밀러가 그의 작품 ‘12살의 모나리자’를 구입하였는데, 이것이 그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1963년그 작품은 메트로폴리탄의 오리지널 모나리자 전시와 때를 맞춰 MoMA 현대미술관 입구에 걸리고 보테로라는 이름이 뉴욕에 알려지게 된다.
    5. 당시 상황
    당시 미국은 1950년대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 작가들을 중심으로 추상 표현주의, 앵포르멜, 팝아트 등 ‘미국형 회화’가 새로이 발전 중이었다. 앤디 워홀과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가 뉴욕 미술계를 장악한 상황에서 보테로의 작품은 호평을 받지 못했다. 물론 비평가들도 서로 다른 평을 할 수 있다. 고흐의 작품을 형편없다고 평하고, 세잔느가 마음에 들지 않아 휴지처럼 버린 작품을 엄청나게 칭송하는 등의 일이 종종 생기는 것이 미술계다. 그런데 미국 미술계의 입맛에 맞지 않는 뚱보 그림을 사람들은 환호했고 ‘타임’지에까지 실리게 된다.

    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
1932년 4월 19일~2023년 9월 15일)
    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 1932년 4월 19일~2023년 9월 15일)

    보테로 작품 알아가기

    보테로의 그림을 보면, ‘데포르마숑’ 즉 대상을 의식적으로 확대하거나 변형시킴으로써 작품의 본질을 명확히 하거나 미적 효과를 올리는 표현기법을 쓴다. 보테로는 르네상스식 최대의 볼륨을 그림자가 아닌 최대한 색으로 그려내는 자기 스타일을 가진다. ‘춤추고 있는 연인’에서 그는 최대한의 색감과 볼륨을 통해 편안한 웃음을 선사한다. 그런데 전략적으로 형태에 집중하고 인물의 개성을 배제하여 무표정한 채로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형태나 비율이 자유롭다. 주제만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개의치 않는다.

    “저는 뚱뚱한 여자들을 그리는 게 아닙니다. 풍만함과 넉넉함, 관능성이 좋은 거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보테로는 ‘뚱뚱한 사람을 그리는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는 “나는 한 번도 뚱보를 그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단지 “남자, 동물, 풍경, 과일의 관능적인 느낌을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며 “색감과 양감(볼륨)을 중시하다 보니 풍만함이 강조됐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훨씬 깊고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풍만한 형태를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함으로써 미술사를 통틀어 독보적인 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었던 그의 작품은 한 눈에 보아도 “보자마자 보테로! 누가 봐도 보테로!”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영향

    ‘콜롬비아의 국민 영웅’으로 여겨질 만큼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는 보테로는 프랑스 파리 최초 샹젤리제 거리 전시, 뉴욕 최초 파크 애비뉴 전시, 조각가 최초 르네상스 거장들과 동반 조각 전시를 했을 정도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에서도 최고 경지에 오른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이뿐만 아니라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독창적 스타일로 전세계를 사로잡으며 행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술가라 평가받는다. 

    작품스타일

    1.인체의 양감에 대한 새로운 발견

    보테로의 화풍은 명암과 원근법을 단순화하며 현란한 원색을 사용해 대상의 풍만한 형태감을 강조하도록 화면을 구조적으로 구성 했다. 그가 추구했던 과장된 양감 표현은 대상의 사실적 재현이라기보다는 객관적이면서 관념적인 형태를 추구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양감의 표현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를 추구한 입체파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20세기 이후 여성의 미에 대한 기준이 달라지면서 마른 몸에 대한 선호도가 증가하고 풍만한 신체 형태는 호감도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테로의 풍만한 인체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권위나 위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실제 신장보다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보테로의 작품은 실제로 어떤 사람을 신체적으로 크게 느끼게 하는 논리에 대해서 조롱하고 있다. 1957년 보테로가 미국 활동 당시 국제미술계는 추상표현주의가 유행을 하던 시기였다.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영감에 기반을 둔 추상 표현주의의 양식적 특징은 형체가 해체되고, 붓질의 우연한 효과가 강조 됐다. 이러한 추상표현주의와는 달리 그의 작품은 확고한 형태감을 추구하였던 점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드러났다. 작품이 비록 슬프고 우울한 주제더라도 다른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 내적으로 견고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진실의 힘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로 인해 보테로는 고전과 현대, 유럽과 신세계, 개방과 폐쇄, 기쁨과 슬픔의 경계에 흔들림 없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신념의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 나는 모든 것을 그릴 수 있기 바란다. 마리 앙투아네트까지도, 그러나 나는 항상 내가 그리는 모든 것들이 라틴 아메리카의 정신이 깃들여지기를 바란다.” 보테로는 자신의 문화적 뿌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가 살아온 세계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그가 보여 주는 독창적이면서 다양한 주제는 라틴문화를 형성하는 풍부한 토양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라틴 의 삶’은 라틴 문화의 근원에 대한 보테로의 관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라틴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대표작

    대표작으로 <모나리자>, <루벤스와 아내>가 있다. 1959년에 그린 ‘12세의 모나리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작 ‘모나리자’를 차용해 익살스럽고 경쾌한 색감으로 패러디한 작품이다. 미소를 짓고 있는 풍만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 모나리자가 지닌 고귀함이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살짝 걷어냈다. 원작의 어둡고 무거운 색채 대신 밝고 가벼운 색채를 활용했고, 구도와 비례도 무시했다. 원작을 비트는 시도로 오랫동안 우상처럼 각인돼온 아름다움의 규범을 가볍게 건드린다. 보테로는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도 그림으로 명쾌하게 보여준다. 1961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보테로의 이 작품을 구입해 화제가 되면서 단번에 보테로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루벤스와 아내
    루벤스와 아내
    모나리자
    모나리자

    영향을 받은 예술가

    젊은 시절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뚱뚱한 그림’에 매료된 그는 사람들의 모습을 풍만하고 묵직하게 그려낸다. 부풀려지고 독특한 양감이 드러나는 정물 등을 통해 특유의 유머감각과 남미의 정서를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정상적인 형태감과 화려한 색채로 인해 그의 화풍은 유치하게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천태만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그의 조형관은 중남미 지역의 정치, 사회, 종교적인 문제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 경향도 엿 볼 수 있다.

    Q&A

    Q: 작업실을 파리, 모나코, 뉴욕, 이탈리아, 멕시코, 콜롬비아에 두고 있는데. 작업실이 많은 이유는?
    A: 머무는 장소에 따라 작업실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 파리와 이탈리아를 오갔고, 15년을 뉴욕에서 살았다. 몬테카를로에는 아내가 그리스 사람이기 때문에 종종 들리는 것이다. 또 나는 알다시피 콜롬비아 사람이다. 계획했던 건 아니었지만 평생 집을 모으며 산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유목민 삶을 좋아한다.
    Q: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A: 지치는 법이 없다. 한 작업실에서 다른 작업실로 옮길 때면 지금까지 한 게 아무것도 소용 없다는 기분이 든다.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그림을 한 곳으로 보내놓곤 하는데, 덕분에 항상 새로운 곳에 도착하게 되는 거다. 그게 또 매력이다. 더군다나 난 프레임 없이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하면 창작에 대한 자유가 한없이 허용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천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파리에 있는데 뉴욕에서 작업하고 싶다면 그대로 천을 둘둘 말아 뉴욕으로 가는 거다.
    Q: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가?
    A: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한다. 매일매일, 주말도 포함해서. 그림 그리는 것보다 재밌고 즐거운 일을 못 찾았다. 내게 회화는 뭔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엑스터시 같은.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중독 말이다. 매일 10시 30분이면 이곳에 와서 저녁 8~9시까지 있다가, 아내 소피아를 만나기 위해 레스토랑엘 간다. 그런 라이프스타일이 좋다. 이 직업이란 게 너무 적막해서 밤에는 좀 시끌벅적한 게 필요하단 생각도 들긴 하지만.
    Q: 어릴 적에 투우사가 되고 싶었다던데?
    A: 투우를 너무 좋아했다. 평생 동안. 지금도 위대한 투우사 엔리케 폰세를 무척이나 동경하고 팔로모 리나레스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 자신의 첫 장검과 투우복 한 벌을 내게 선물하기도 했다.
    Q: 예술에 대한 열정이 투우에서 나오는 걸까?
    A: 예술과 투우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묻겠지만 투우를 보며 자라서 열정적인 사람이 된 것 같다. 열정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면 고스란히 작품에 묻어난다.
    Q: 열정적인 예술가로 성공했지만 상처도 참 많다고 들었다.
    A: 그렇다. 아픔 없는 예술은 없는 것 같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코르도바로 가는 길에 네 살 난 아들을 차 사고로 잃었다. 평소에 그리던 양의 배로 그림을 그렸다. 아내와 나는 무섭게 일만 하며 아픔을 이겨냈다.
    Q: 아내인 소피아 바리(Sofia Vari)도 화가, 조각가, 보석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분야의 예술가와 함께 사는 건 어떤가?
    A: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긍정적인 점이 많다. 아내는 추상화가지만 둘 다 예술 역사에 관심이 많아 같이 박물관이나 대성당을 구경하기도 하고, 미술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Q: 아내의 추상주의를 보고 추상화를 시도해본 적 있었나?
    A: 없었다. 구상주의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한 치의 의구심도 없다. 추상주의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너무 장식적이다. 나는 예술을 장식적 가치와 표현적 예술 사이의 균형이라고 본다.
    Q: ‘예술가가 대의명분을 품으면 정치 삽화가가 될 수 있기에 위험하고 예술의 목적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A: 예술은 항상 즐거움을 주기 위해 존재해왔다. 푸생은 “예술이란 즐거움을 주기 위해 평면 위에 존재하는 형태와 색의 표현”이라는 말로 예술을 완벽하게 정의한 바 있다. 그건 나에게도 가장 우선인 가치다. 
    Q: 정식 교육을 받지 않고 주류의 흐름 밖에서 커리어를 쌓아왔는데.
    A: 나는 비평가들에게 빚진 게 하나도 없다. 평생 주류의 흐름을 거스르며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미술계가 ‘추상주의’를 숭배할 때 나는 ‘구상주의’를 추구했고, 여전히 오늘날의 흐름과 반대되는 길을 걷고 있다. 예술은 결코 정답이 없는 건데 나 같은 스타일은 성공을 가늠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Q: 최고라 자부하는 작품은 어떤 건가?
    A: “이 그림이 최고다!”라는 말은 아마 죽을 때까지도 못할 것 같다. 물론 전시회를 열 때, 꼭 전시하고 싶은 그림이 20~30여 점 정도 있기는 해도. 다만 그게 맞아떨어졌을 때, 목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느낀 다는 거지 이 작품이 최고, 저 작품이 최고라는 말은 못한다. 항상 다음 작품이 내 생의 최고의 작품일 거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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