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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현대미술

한국 초상화의 거장 '장욱진 화백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by 갖고싶은예술 2023. 10. 26.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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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욱진은 대한민국의 화가입니다. 현대미술사에서 한국적 추상화를 확립한 거장 중 한 명으로 높게 평가받는 화가입니다. 장욱진 화백의 삶과 작품스타일, 화백이 사랑받는 이유, 장욱진 그림, 전시회 반응, 집의 의미, 딸의생각에 대해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장욱진 화백의 삶

    장욱진(張旭鎭)[1917~1990]은 1918년 1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의 대지주 가문에서 4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욱진의 아버지는 시·서·화에 안목이 있어서 스스로 병풍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렸고, 아이들에게도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장욱진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중고등학교] 미술반에서 그림에 열중할 때 일본 도쿄예대 출신 미술교사의 수업을 통하여 당시 유행하던 입체파와 피카소의 미술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장욱진은 향토적인 주제를 문화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으며 진보적인 화풍을 그림에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인 역사 교사에 항의한 사건으로 퇴학 처분을 당한 뒤 화가 공영진 화실에서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다. 장욱진이 자신의 화풍을 확립하게 된 시기는 유학시절이었다고 추정된다. 1939년 일본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제국미술학교에서 그는 나카야마 다카시中山巍(1893~1978),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1897~1981)와 같은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이들은 진보적인 회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는 모더니즘을 수용하는 교육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자연스럽게 모더니즘 형식을 띄게 된다. 졸업 후, 조국으로 돌아온 그에겐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제 징용에 끌려갔고 해방 직후, 6·25전쟁이 터져 피난을 가게 되었다. 피난에서 돌아 온 후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박물관에 취업했으나 삼 년 만에 그만둔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활동은 계속 되었다. 그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자화상>이다. <자화상>은 전쟁의 상흔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작품이다. 오히려 밝은 화면이 눈에 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가 보리밭길을 걷고 있다. 이 신사는 다름 아닌 장욱진 자신이다. 주변 상황과 상관없이 고집 대로 제 갈 길을 가겠다는 화가의 신념이 드러난다. 휴전 이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그와 가족들은 서울로 귀환을 한다. 그의 아내가 조그마한 책방을 차렸고 1954년엔 그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교수로 발령이 나면서 생활은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그는 7년 만에 교수직을 사퇴하고 만다. 그림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본인의 신념 때문이기도 했고 남을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가 창작활동을 하는 것에 더 뜻을 두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교수직을 관둔 후 명륜동에 양옥집을 마련한 그는 전업화가로서 살기 시작한다. 1960년대는 한국에 모더니즘이 밀려온 시기였다. 그 또한 이런 모더니즘의 물결에 영향을 받아 그림에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그의 말처럼 초기에는 주로 바르고 부치는 작업을 통해 두꺼운 질감과 강한 붓 터치의 작품들이 제작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동안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에는 <진진묘眞眞妙> 가 있다. 이 작품은 그가 예불에 열중하는 아내를 보고 감명을 받아 그린 것으로 아주 단순한 선으로 간결하게 아내의 형체만이 표현되었다. 절제된 표현 안에는 육체를 걸러내 그 안의 정신세계를 조명하고자 한 장욱진의 의도가 드러나는 것 같다. 1960년대 말 이후로 화가는 자기 정체성을 찾게 된다. 예순을 넘긴 화가는 안정된 생활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바깥에 눈 돌리지 않고 자신의 조형 세계를 추구하는데 이는 보통 덜어내는 작업이었다. 판화가 전후연의 권유로 목판화 작업도 시작했는데 양각보다는 음각작업을 즐겨했다.

    장욱진 화백 (1917. 11. 26~1990. 12. 27)
    장욱진 화백 (1917. 11. 26~1990. 12. 27)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관람 예약 바로가기 전시 관람 예약하기 디지털 정보실 예약하기 --> 자주 묻는 질문 바로가기 화요일-일요일 10:00-18:00 (월요일 서울 개관) 서울·덕수궁:수요일, 토요일 야간개장

    www.mmca.go.kr

    장욱진 그림

    장욱진 가족도. 1972&#44; 캔버스에 유채.[사진 현대화랑]
    장욱진 가족도. 1972, 캔버스에 유채.[사진 현대화랑]
    장욱진&#44; 가족&#44; 1973. [사진 현대화랑]
    장욱진, 가족, 1973. [사진 현대화랑]
    장욱진&#44; 나무위의 아이&#44; 1975. [사진 현대화랑]
    장욱진, 나무위의 아이, 1975. [사진 현대화랑]

    작품 스타일

    장욱진의 작품 스타일은 주로 추상미술(abstract art)에 속하며, 직관적이고 어린아이 같은 심성으로 평생을 자연 속에 살면서 동화적이고 이상적인 내면세계를 그렸다. 까치 같은 새와 나무 등 자연에서 오는 소박한 소재를 사랑하고 다루었다. 나는 “심플하다”를 강조하며 복잡한 체면과 권위에서 벗어나 일생을 깨끗하게 살려고 하였다. 자연 산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안에 내재된 근원적이고 정신적인 본질을 추구하였다. 무척 외로운 것 같으면서도 고고하였고, 예술가로서 순도 높은 자부심의 소유자였다. 덕소 시절에 화실에서 오로지 그림만 그리면서 고독한 작업을 이어 갔다. 마음이 넓고 순진하고 모든 것을 달관한, 그래서 남의 시선이나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초탈한 완전한 자유인의 기상을 가졌다. 가정 경제도 아내에게 맡기고 장욱진은 오직 그림만을 고집하였다. 장욱진은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에서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 하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내가 오로지 확실하게 알고 믿는 것은 이것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장욱진의 마음은 진작부터 이상세계에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장욱진은 그림으로 자신이 동경하는 이상향을 만들어 가는 작품 방식과는 반대로 이미 장욱진의 마음속에 이상향을 그림을 통해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왼)정욱진, 닭과 아이,1990.(사진현대화랑)                             오) 장욱진, 얼굴, 1957. (사진 현대화랑)                                                                                        

    장욱진 화백이 사랑받는 이유

    장욱진 화백은 우리나라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미술계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먼저, 작가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필자는 작가로서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해온 것이 그가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은 인간의 생명처럼 무한한 고독이다. 아니 그것은 무한히 고독한 작업의 산물인 것이다. 이 대규모적 고독의 물결이 예술가도 채 못 되는 나에게 덮쳐와 잃어버리는 망각 속에서 버둥대는 자신을 보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살아생전에 했던 말들이다. 오로지 고독 가운데 서서 아름다움만을 위한 작업을 계속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이러한 그의 평생에 걸친 노력은 그를 작가로서 떳떳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의 작품을 진실 되게 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본 많은 이들은 감화하고 더 나아가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품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그의 그림에 녹아있는 상반된 두 욕망이 매력을 끌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친근하다는 인상을 준다. 더불어 동화적이고 꿈같은 분위기도 풍긴다. 그는 이를 일상성과 초월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겐 상반된 욕망이 있다. 그것은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자아실현의 바램이다. 이 두 가지 욕망은 거부감 없이 작품에 어우러져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끈다. 두 번째로, 문인화적 기질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유화물감을 동양화의 먹처럼 이용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무위자연’의 동양적 정신성을 그의 회화관에 구현했다. 이러한 요소는 감상자가 그의 그림으로부터 산수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감상자에겐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준다. 선조들이 산수화를 이상향이자 마음의 안식처처럼 여긴 것처럼 말이다.

    딸의 생각

    딸이 말하는 아버지는

    "나는 심플하다."

    화가 장욱진(1917~1990)이 생전에 자주 했던 말이다. 그의 장녀 장경수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가 아버지를 회고하며 쓴『나의 아버지 장욱진』(2019, 삼인)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림도, 정신도, 삶도 당신 말씀대로 심플했지만 유품까지도 우리가 섭섭할 정도로 심플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1990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화실을 찾았더니 너무도 깨끗해 "낙서 한 장 없었다"는 것. 그런 화실을 보며 야속하고 섭섭해 쓰레기통까지 다 뒤졌다는 딸은 책에 이렇게 덧붙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날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셨던" 분이라고.

    전시화 반응

    전시장에서 직접 만나는 장욱진 그림은 여러 면에서 관람객을 놀라게 한다. 첫째 손바닥 만한 크기의 그림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라고, 둘째 그 작은 화면 안에 산과 해, 나무와 새, 집과 여러 명의 가족 등 있을 만한 것들은 다 있어서 놀란다. 작가는 손바닥만한 화폭에도 간결한 조형 묘사로 우주를 다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장욱진 화백에게 집이란?

    장욱진은 화백이나 교수보다 ‘집 가’(家)자가 들어가는 ‘화가’(?家)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만큼 집을 아꼈다. 장욱진은 한적한 시골의 오래된 한옥과 정자를 손수 고쳐 아틀리에로 탈바꿈시켰다. 일이 삶이요, 집이 작업실이었다. 1963년 양주 한강변에 지은 덕소 화실, 75년 낡은 한옥을 개조한 명륜동 화실, 80년 농가를 수리한 충북 수안보 화실, 86년 초가삼간을 개조한 용인 마북동 화실이 그곳이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며 예술의 본질에 다가가려 노력한 예술가의 흔적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다. 출퇴근이 따로 없는 일상, 집이 곧 작품이었다. 그래서일까. 장욱진의 작품에는 세월에 따라 그가 머문 집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 버려야겠다”
    “집도 작품이다”

    세 달 동안의 수리 기간을 거친 후 5년간 살았던 용인 신갈의 화실은 장욱진의 마지막 아틀리에였다. 평생 그린 720여 점 중 3분의 1에 달하는 220여 점을 남기며 뜨거운 예술적 열망을 작품에 모조리 녹여냈던 장소였다. 작가의 손을 거친 낡은 초가삼간은 안채 세 칸과 맞은편 사랑채로 개조되었고 정자와 두송나무로 이루어진 울타리로 옛 한옥의 격식을 갖추었다. 용인 한옥에 산 지 1년 반이 지난 1989년 3월 장욱진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구성된 양옥을 짓기 시작했다. 1층은 응접실과 부엌으로, 2층은 화실과 침실로 정성을 다해 설계했던 이 집에서 1년 반을 살다 1990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현재 이 집은 등록문화재 제 404호로 장욱진이 생전에 생활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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