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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조각

실존적 조각가, 리얼리티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by 갖고싶은예술 2023. 10. 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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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는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연약함과 삶의 덧없음속에 또 다른 집념을 담고 있으며, 특유의 가늘고 길쭉한 형상으로 특징 지어집니다. 자코메티의 예술적 여정을 알아가는 것은 현대 미술에 대한 그의 영향력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수 있게 됩니다. 자코메티의 삶과 작품스타일과 특징, 여담, 영향에 대해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삶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1901년 태어나 1966년까지 짧은 인생을 산 천재 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 스위스의 그림 같은 보르고노보에서 태어난 자코메티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그의 아버지 덕분에 일찍 예술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제네바 예술학교를 졸업한 뒤에 파리로 가서 오귀스트 로댕의 조수였던 앙투앙 부르델의 밑에서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때 자코메티는 큐비즘과 초현실주의에 눈을 뜨게 되고, 이러한 경험은 후에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당시 그는 호안 미로, 막스 에른스트, 파블로 피카소 등의 예술가들과 함께 공부한다. 그는 자신과 가까운 사이의 여인들을 모델로 하는 것을 추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자코메티 특유의 얇고 가느다란 조각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까지, 그는 인간의 모습을 더 현실적으로 포착하고 싶은 충동에 이끌려 초현실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이 시기 동안의 그의 경험들은 극적으로 그의 관점을 재구성했다. 미술사를 보면 놀랍게도 시대가 작가를 만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어떤 변화와 혁명의 시대는 늘 대단한 작가들을 낳았다. 20세기가 그 어떤 시기보다 많은 작가를 배출했고, 미술이라는 개념이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면, 분명 20세기라는 시간은 인간사에서 매우 특별하게 많은 가치와 패러다임이 변한 시대임은 확실한 것 같다. 우리가 자코메티와 연관 짓는 얇고 쭉 뻗은 형상들은 그 시대의 실존적인 고뇌를 반영한다. 이 형상들은 비록 왜곡되었지만, 절망, 고립, 그리고 회복력과 씨름하는 인류의 모습인 사실주의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자코메티는 1934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줄리안 레비화랑에서 할 만큼, 좋은 시작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33세에 불과한 자코메티가 뉴욕에서 당시 파리의 피에르 콜 갤러리만큼의 명성을 갖는 화랑에서 개인전을 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고, 그의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은 국제 미술계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평생 딜러이자 파트너는 피에르 마티스 였다. 사실 이러한 상업적 꾸준한 지원이, 그가 그만의 언어를 구축하고 집요하게 자신의 세계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요인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청동작품 제작에 투자를 하고, 파리의 매그 갤러리와도 계약을 맺고 더욱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이 그의 삶의 방식을 전혀 바꾸지 않았고, 그는 매우 검소하고 한결같았다. 그는 금전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파리 몽파르나스 아폴리트맹드롱가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평생을 보냈고, 셀렉트 카페 또는 쿠폴 카페에서 늘 식사를 하며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다. 그는 단지 치열하게 모델과의 집요한 싸움에 전념했다. 사실 모델을 놓고 작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가를 우리는 잘 모를 수 있다. 그는 평생 몇 안 되는 모델과 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남자 조각은 그의 동생 디에고(Diego Giacometti)가, 또 여성모델은 그의 아내인 아네트 암(Anette Am)이 맡았다. 그들은 하루에도 5~6시간을 같은 자세로 앉아서 그의 작업 대상이 되었다. 자코메티는 1966년 심장병으로 죽기 전 약 10년 동안 작가로서 매우 성공적인 작품활동과 전시를 했다. 1955년 뉴욕 구겐하임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고, 1956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위한 기념비적인 여인상을 제작한다.  1965년엔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면서 그의 국제적 명성은 더욱 치솟았다. 당시 중견 작가로서 국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가였을 것 같다. 미술은 세 번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처음은 작가가 작품을 만들 때, 다음은 컬렉터가 구입 할 때, 마지막은 그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 질 때이다. 그가 직접 미술관을 만들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당시 친구인 한스 베츨러와 에른스트 다니엘러가 화상과 함께 진행한 시민운동으로 자금이 모아졌고, 1965년 알레르토 자코메티 파운데이션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그의 작품들은 스위스 취리히 쿤스트 하우스, 바젤의 쿤스트 뮤지엄, 빈터투어의 쿤스트 뮤지엄 등 세 곳에 둥지를 틀었다. 자코메티는 이렇게 자신의 파운데이션이 만들어지고 안착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1966년 6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66년 스위스 쿠어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기까지 38년간 그는 초라한 아틀리에에서 자신만의 작품 제작에 전념했다. 그러나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한 그 작고 열악한 공간이 작다고 느끼지 않았고, 오래 있을수록 점점 커져서 원하는 모든 것을 넣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작업실은 그의 모델들과 유명 인사들로 가득 찼고, 유명한 사진작가들이 앞 다투어 방문해 기록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

    알베르토 자코메티 작품 스타일과 특징

    자코메티의 조각품들은 키가 크고 가늘거나 작거나 빽빽하거나, 존재의 본질을 포착한다. 그의 형상들은 종종 고독하고, 제자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성찰의 순간이나 움직임의 고통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의 끊임없는 표면 재작업으로 인한 그들의 거친 질감은 인간의 여행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완성되지 않은 분위기를 준다. 그는 사물과 인물을 자신만이 인지하고 보이는 대로 재현하기 원했기 때문에, 대상의 크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지 작품의 대상이 모델뿐만 아닌 그 모델이 있는 공간과 주변 사물과 맺는 관계들까지도 시각화하려는 것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조각해도 그의 또는 그녀의 영혼이나 느낌, 분위기, 기운까지도 함께 표현하려 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과 깊은 성찰로 전쟁의 황폐함으로부터 회복하는 한 세대의 불안과 희망에 목소리를 냈다. 그의 예술은 시간을 초월하고, 인간 경험의 보편성에 대해 말한다. 20세기 예술의 진화와 예술과 철학의 융합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코메티의 작품은 필수적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눈’에서 시작된다. 그에게는 모델들의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 드로잉과 스케치에서도 눈을 여러겹 칠한 것으로 시작해 골격을 만들어 완성해가고 있다. 자코메티의 완성하는 얼굴은 해골 같지만 죽음과 구별되는 살았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눈과 시선이 있기에 다른 것이다. 자코메티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것은 죽은 자의 해골에 불과하다. 결국 죽음과 개인을 구별해주는 것은 시선이다.” 라고 말했다. ‘걸어가는 사람’의 생생한 눈과 쏘아보는 듯한 시선은 불안하고 두렵지만 당당히 나아가야 하는 실존적 인간의 입상이다. 로타르의 눈빛이 절망적인 인간의 슬픔이라면, 걸어가는 사람의 눈빛은 시지프의 신화처럼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적 인간의 당당함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

    •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이의 우정. 친한 예술가들을 사진 작품으로 남기는 것을 즐겼던 브레송은 자코메티의 모습을 몇 개의 작품으로 남겼다. 그 중 하나가 비오는 날 파리의 거리에서 코트를 뒤집어쓰고 길을 건너는 사진이다.
    • 성기능 장애가 있었다보니 실제로 거기랑 관련된 콤플렉스가 있다고 한다. 자식도 없어서 아내 아네트가 작품 소유권을 물러받았고, 아내도 1993년 타계한 후로는 자코메티 재단이 세워져 거기서 관리하고 있다.
    • 동생 디에고 자코메티와의 돈독한 형제애도 매우 유명하다. 디에고는 어렸을때부터 순수하게 예술을 지망해온 알베르토와 달리 여러 직업들을 전전하면서 다양한 기술들을 배웠는데, 이 경험들을 살려 알베르토의 수많은 예술작품의 실제 제작에 기여한 중요한 조수역할을 맡기도했다. 특히 알베르토는 동생 디에고를 모델로한 작품들을 엄청나게 많이 만들었다. 디에고는 전쟁당시 홀로 파리에 남아 알베르토의 화실을 무사히 지켜낼정도로 형 알베르토를 따랐는데, 알베르토가 직접 동생 디에고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태울만한 재능이 있다고 평할정도로 예술에 나름 재능이 있었지만, 디에고는 늘 스스로를 형과 비교했을때 자신은 일개 공예가일뿐이라고 낮춰 이르면서 평생을 알베르토의 작업을 돕는데에만 집중했다.다만 디에고는 형처럼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지 않았을뿐이지, 가구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형 알베르토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예술적 감각의 가구와 동물조각들을 많이 남겼다.
    • 파블로 피카소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1951년에 서로 의절한다.
    • 세상에서 가장 비싼 조각작품. 아마도 자코메티의 조각은 그의 독창적 예술성과 천재성으로 인해 최대의 찬사를 받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사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현대미술이라는 점도 그러한 작품에 대한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다. 2010년 런던 경매에서 1200억원(1억400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하더니, 2015년 1600억원(1억4130만 달러)를 기록하면서, 언젠가 1000억원대의 피카소 가격을 이겼다. 매우 섬세한 작품이기에, 운송이나 보험이 많이 든다고 한다.
    • 로뎅과 차별화. 프랑스에서 근대 조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댕의 남성적이고 감정 표현을 담고 있는 조각과는 매우 다른, 가느다랗고 길게 늘어진 인체를 제작한 조각을 보여준다. 20세기 초의 초현실주의적 연구과 접근이 그의 조각을 당시의 로댕과 매우 차별화하는 시작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의 조각은 아주 집요한 ‘관찰’에서 시작된 새로운 리얼리티 구축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자코메티의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손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그 대상을 계속해서 매만지고 다듬어 가면서 그 대상을 구현해 내는 상상을 할 수 있게 한다.
    • 세잔을 존경. 어릴 때부터 세잔을 아주 존경한 자코메티였기에 대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모방을 기본으로 시작하는 태도는 매우 오랫동안 자코메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상당한 문학가였다.  모든 작품을 할 때마다 본인의 작품에 대한 글을 남겼고, 당시 최고의 철학가와 문학가들과의 교류도 매우 활발하였다.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은, 중요한 작가들 옆에는 동시대 최고의 철학가나 문인들이 함께 있었던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1926년 파리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평생 그와 함께하고 논쟁하고 살았던 초현실주의 설립자인 앙드레 브루통, 사르트르-시몬드 보봐르 커플, 철학가 바타이유와 교류했다. 이런 만남이 그의 작업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근간이 된 것은 물론이다. 1948년엔 사르트르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에게서 온 편지라는 글’을 소개하는 문학 행사를 열기도 했다. 또한 많이 알려진 것과 같이 사무엘 베케트와의 인연으로 그의 연극 공연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도 만들기도 하였다.
    • 자코메티의 가장 중요한 컬렉터는 데이비드 톰슨이라는 미국 피츠버그의 강철업계 거물이다.

    작품의 영향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첨예하고 실존적 경험이었던 제1, 2차 세계대전의 한 복판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런 시대상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그만의 독특한 질문과 사색을 하게 하는 토양이 됐다. 예술의 본질이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탐구라면, 그는 인류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의 교류 과정을 통해 그만의 정신세계를 구축했고, 결국 새로운 조각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앞을 향해 걸어가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한 형상은 인간 존재의 허약함과 존재의 덧없음을 강조하며 실존의 깊은 심연을 드러낸다. 자코메티의 인물 조각상의 특징은 깍을대로 깍고 덜어내고 최대한 비워냄으로서 최후의 앙상한 가지처럼 길다란 뼈마디 형상만 남은 실존적 인간의 모습과 그토록 메마르고 황량한 형상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형형한 눈빛, 살아있음의 증명인 듯 차별화된 인간 제각각의 시선에 있다 할 것이다. 자코메티는 1935년부터 모델을 실물과 같이 재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자신에게만 보이는 형상, 모델의 겉모습을 넘어 그 존재 자체를 통찰하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그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을 갖게 하는 극적 계기가 있었으니,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노신사와 같이 여행하던 중 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죽음을 목도하고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날 나는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불행을 절감했으며, 모든 인생이 고독하고 무상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의 삶의 가치가 완전히 바뀌면서 자코메티는 값비싼 집도, 멋진 삶도 부질없음을 깨닫고 호텔에서 살고 카페 같은 잠깐 머무르는 장소를 좋아했다. 살아생전 부와 명예를 가졌음에도 그는 몽파르나스 7평 작은 작업실에서 평생 몰두했다. 그날 이후 자코메티는 인간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고,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해내야하는 것으로 기존의 인체미학이 아닌, 겉치레의 모든 장식과 동작을 생략하고 근육의 살점마저 들어내고 가늘고 긴 골격만을 지닌 채 불안하게 서 있는 고독한 인물상을 창조했다.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뜨린 거칠고 앙상한 인체, 자코메티가 바라본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2차 대전 이후 망연자실한 허무와 고독을 응시한 표현이기도 하다.  ‘걸어가는 사람’은 사르트르와의 교분으로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인상을 주기도 한다. 자코메티는 파리로 이주해 앙투완 부르델에게 조각을 배우고(1922), 입체주의와 구조주의에 영향을 받은 초기 실험작과 앙드레 브르통과의 만남(1930), 이후 초현실주의자들과도 만나 운동에 참가하면서〈보이지 않는 사물>,〈4시의 궁전〉, <걷는 사람> 등의 작품을 제작한다. 1939년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나 교류하고, 1946년 길고 날씬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나는 늘 생명체의 허약함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나 느낌을 가지고 있다. 마치 계속해서 서 있으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해서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아. 그리고 바로 그 허약함이 내 조각들과 유사하다.”
    “인간이 걸어 다닐 때면 자신의 몸무게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가볍게 걷는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것,
    그 가벼움이다.“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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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Homme au doigt (가리키는 사람)

    L'Homme au doigt (가리키는 사람) 1947년에 나온 작품이며 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4130만 달러에 낙찰 

    L&#39;Homme qui marche (걷는 사람)
    L'Homme qui marche (걷는 사람)

    L'Homme qui marche (걷는 사람) 1961년에 나온 작품이며 알베르토 자코베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 위 작품 다음으로 제일 비싼 조각품.


    포스팅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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